함께 읽는 시

in blurt •  10 months ago 

봄볕에 반짝이는 연두가
입하를 지나면서부터
눈을 내리뜨고 제 발등만 내려다 보며
생각에 잠겨 살더니
어느 아침 초록으로 훌쩍 성숙했다

손바닥만한 갈잎으로
머리에 왕관을 만들어쓰고
삘기를 한 주먹씩 꺾어들고
수근거릴 때마다 누릇누릇 여무는 보리밭길을
개구리처럼 왁자지껄 하게 뛰어다니던 날

하나 같이 입가가 시커먼
고만고만한 머슴아들끼리
오줌줄기로 뱀딸기꽃을 맞추어 떨어뜨리면
삘기를 다 주기로 했다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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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만(小滿)/ 나희덕

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
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

조금 빈 것도 같게
조금 넘을 것도 같게

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
내 마음의 그늘도
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
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

소만 지나
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
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
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
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

소만 지나면 들리는 소리
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
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
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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